안찬일 탈북자 1호 박사, ‘DMZ 평화 마케팅’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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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찬일 소장은 16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연천군 백학면과 파주시 임진각 일원에서 진행한 ‘안찬일 박사와 연천 DMZ 평화이야기 여행’ 팸투어(사진)에서 “생태계가 잘 보전된 DMZ 탐방에 가장 적절한 시기는 바로 지금”이라면서 이같이 밝혔다.
안찬일 소장은 “평화 분위기에 편승해 비무장지대 남북 GP를 폭발시키는 등 철거작업이 이어지고 있지 않느냐”며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DMZ의 모습은 더욱 많이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인 안찬일 소장은 신의주 대학 1학년 때 북한군에 자원입대했다. 북한 2군단 3사단 민경부대 소속 부소대장(상사)이던 1979년 7월 27일, 서부전선 군사분계선(MDL; Military Demarcation Line)과 DMZ를 넘어 육군 25사단 관할 구역으로 귀순했다.
북한군 복무 당시 남침갱도인 제1땅굴을 파는 작업에 참여했던 안 소장은 16일 팸투어 참가자들과 함께 25사단 상승전망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25사단 장병들이 1땅굴을 발견한 이후 북한은 진행하던 12개 땅굴 작업 중 상당수를 중단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안 소장이 참여한 ‘제1땅굴’이 지난 1974년 11월,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에서 발견된 이후 현재까지 모두 4개의 남침용 땅굴이 우리 지역에서 확인됐다. 1975년 3월 강원도 철원군 근동면에서 발견된 ‘제2땅굴’을 비롯해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제3땅굴’과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제4땅굴’이 각각 1978년 10월과 1990년 3월에 발견됐다.
귀순 이유에 대해 안 소장은 “과거 북한은 땅굴을 파는 군인들에게 승진과 복지에 있어 다른 부대와 차별화 된 배려와 혜택을 줬다”면서 “남한행을 실행하기 보름 전쯤 모범군인으로 뽑혀 평양을 방문했었는데, ‘북한식 사회주의’가 내리막길이라는 느낌을 받아 그간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을 실행하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안 소장은 “22살에 노동당에 입당한 상태였고, ‘군 예편 뒤 김일성종합대학에 진학하라’는 당의 권유도 있었다”면서 “하지만, 당시 대학생들은 군인들 급식보다 못한 음식을 먹는 실정이었다”고 설명했다.
목숨을 건 귀순 과정에 대한 생생한 증언도 나왔다. 안 소장은 “제가 남측으로 뛰어 갈 경우, 함께 있던 부대원 29명 가운데 근무자를 제외한 10명 정도가 추격해 뒤따를 것으로 계산했다”며 “30발의 총알을 장전한 뒤 탈출을 감행했는데,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29발을 사격한 뒤 남은 1발로 자살할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귀순에 성공한 안 소장은 “가족들과 생이별을 감수하면서까지 감행한 탈북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안 소장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고려대 정치학 석사와 건국대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탈북자 1호 박사’ 칭호를 얻게 됐다.
오늘 팸투어는 한국관광공사 경인지사, 연천군, 세계북한연구센터, DMZ관광이 주관해 진행됐다. 언론인과 작가 등 오피니언 리더 등 40여명이 참여했다. 연천 25사단 부대 내 상승전망대를 견학하고, 임진각 남북평화기원 ‘평화의 종’ 타종식도 진행했다.
안 소장은 “탈북 이후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은 생활력이 강한 함경도 처녀와의 결혼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라며 “함경도 처녀들은 ‘5장(찬장·이불장·양복장·책장·신발장) 6기(냉동기·세탁기·TV·제봉기·녹음기·사진기)’ 혼수품을 챙겨 시집오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농담을 섞어 말했다. 이어 “최근에는 남한에도 함경도 출신 탈북여성들이 많아지고 있다”면서 “감기 한번 걸리지 않는 건강한 아내가 있어 현생에서는 어려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안 소장은 “정부가 접경지역 개발에 13조원을 투자한다는 애기를 들었다”면서 “냉전을 넘어 민족 화해의 시대에 접어드는 시기에 민족 발전을 저해해 온 DMZ 일대를 국제적인 ‘생태·평화 투어’ 코스로 개발하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한 일”이라고 말했다.
안찬일 소장은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신문이야기 돌직구쇼’. TV조선 ‘모란봉클럽’, 연합뉴스 TV 등에 출연하는 등 왕성한 방송활동도 해오고 있다.